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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관련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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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실 2004-12-10

1. 크리스마스 유래
"크리스마스"란 말을 원래는 Christes Masse - 그리스도 미사(예배)라고 불러 오다가 중세 영국에 와서 두 말이 하나로 합쳐서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날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 - 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이다. 로마에서 이교도들이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정한것과 기독교에서 "세상의 빛"이 탄생한날을 12월 25일로 결정한 것은 이교도들의 "태양의 빛"과 기독교의 "세상의 빛"을 일치시킴으로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더욱 의미있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부터이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기 전에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켰는데 동방교회(동로마제국)에서는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이중 명절로 지켰고, 예루살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부정해 오다가 6세기 이후부터 1월 6일과 12월 25일로 분리하여 경축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Armenia 지방의 교회에서는 1월 6일에 성탄절을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 때문에 1월 6일 현현일을 "작은 크리스마스"(Little Christmas) 또는 "구 크리스마스"(Old Christmas)라고도 부른다.

2. 크리스마스와 X-MAS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오면 곳곳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써 놓은 것을 보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X-MAS라고 쓴 것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X 자는 영어 알파벳의 X자가 아니다.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자인 '크스'자로서 이 뒤에다 MAS자를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표기는 X-MAS로 할 수 있지만 읽을 때에는 반드시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표기한 대로 X-MAS라고 읽는다면 완전히 본 뜻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미지수의 표기를 X.Y.Z로 표시한다. 그것은 '모른다'는 뜻으로 성탄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하나의 축제로 지낸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곧 X-MAS 인 것이다.

3. 산타클로스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는 4세기에 소아시아 지방의 조교로 평상시 불쌍한 어린이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행한 성 니콜라스(St. Nicholas)를 기념하는 관습이라한다.
처음엔 소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이 구라파에 전해졌고, 그것이 화란 사람들에게 까지 전해졌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민해 감으로써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싼타클로스가 흰 털이 달린 빨간옷과 검은 벧트를 두르고 긴 고깔모자를 쓴 모습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 크리스마스 전날엔 양말을 걸어두는 걸까
4세기경 터키의 니콜라스 주교는 어느 귀족의 세 딸이 구혼자가 있어도 가난해서 결혼하지 못하고 있자 결혼지참금을 넉넉히 마련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몰래 도와주고 싶어서 궁리 끝에 굴뚝으로 금 주머니를 떨어뜨렸는데, 우연히 그것이 그 안에 걸어둔 양말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마스날 선물을 양말에 넣어두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4. 크리스마스 선물교환
로마에서 쌔터날리아로 지키는 12월 17일 부터 24일 까지는 흥겹게 지내는 계절이었다. 이때는 집안을 상록수나 상록 담장넝쿨, 그리고 촛불로 장식을 하고 선물을 어린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종들에게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크리스마스에 까지 영향을 미쳐 오늘날도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
또한 동방박사가 아기예수를 찾아와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드린 것을 본받아 기독교인들 간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이 생겼다고도 한다.

5.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독일에서 Martin Luther가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하늘에 별이 빛나고 그 밑에 상록수가 서 있는 모습이 Luther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상록수의 끝이 뾰죽하여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같이 보여 이와같은 나무를 준비하여 자기집 방에 세우고 거기에 별과 촛불을 매 달아서 장식을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성탄 트리를 세우는 풍습이 전래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상록수는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의 "생명의 상징"인 상록수와 기독교인들의 생명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루어진 전통이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것이다.

6.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의 전통과 관습 중에서 가장 즐겁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캐롤를 부르는 것일 것이다. 캐롤은 본래 불란서 말 carole에서 온 말로 주로 중세 불란서에서 둥근 원을 만들어 춤을 추었던 원무(圓舞)를 일컫던 말이었다. 이 원무는 동지때 가졌던 축제에서 사용한 이교도들의 무곡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캐롤은 춤출 때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어서 캐롤이 모두 크리스마스와 반드시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 음악 이 캐롤인지 아닌지는 곡의 가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음악적 형식으로 판단하였다.
서기 129년 크리스마스 때 로마 총독 텔레스 포러스가 교회에 모인 신도들에게 “존귀하신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에 부른 캐롤의 시초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를 계기로 5세기까지 크리스마스 때에는 의례 캐롤이 불려졌다고 한다. 당시 신도들은 캐롤을 부르는 것 때문에 성탄절을 기다렸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캐롤이 얼마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불려지던 캐롤은 대개가 구전된 것이 많아서 가사나 곡이 일정하지 않지만 14세기 무렵부터 악보로 옮겨져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15세기 이전에는 교회내에서 성가 이외의 노래를 부르거나 춤과 연극을 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실제로 캐롤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는 15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이때에 교인들은 설교풍의 지루한 찬송가 대신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의 캐롤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민요에 신앙적인 가사를 붙인 캐롤이 유행했다.

15 세기에 있어서 캐롤은 대중적인 종교 가곡이었고, 불란서의 론도(rondeau), 비렐레이 (virelai), 발라드 (ballade)와 견줄 수 있는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정된 음악 형식이었다. 캐롤음악의 중요성은 그 음악의 화성에 있지 않고 선율과 리듬에 있다. 일반적으로 캐롤은 즐거운 노래로 된 것이 특징이고 대중에게 많이 불려지도록 되어 있다.
캐롤은 본래 교회의 절기 때 마다 부르는 모든 노래를 일컬었지만, 특별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크리스마스캐롤은 조지워더 와 라벌 헨릭“이 캐롤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 외에 지금도 많이 불려지는 캐롤 가운데 ” 그 어리신 예수, 는 “내주는 강한 성이요”의 작시자인 마틴 루터의 대표 작이다.
바로크 시대 이전부터 불리워져 구전되어 온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캐롤로 “저 들밖에, 와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프란츠 그루버의 ”고요한밤,은 캐롤의 고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재미있고 진귀한 아이디어를 내용으로 한 것이 대단히 많은데 이런 것들은 본래 캐롤이 춤을 추기 위한 노래이고, 즐겁고 흥겹고 경쾌한 기분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에서 부를 수는 없는 곡들도 있다.
"Jingle Bells", "싼타클로스가 마을에 오네"(Santa Claus is Coming to Twon), "빨간코 루돌프"(Rudolf the Red-nosed Reindeer), "White Christmas",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등등은 예배에서 부를 수 없는 즐거운 캐롤이다. 특별히 "The Holly and the Ivy"는 기독교적인 내용과 이교도적인 내용이 혼합되어 캐롤이 된 좋은 예이다.

7. 캐롤링 (Carolling)
19세기 상반기 영국에서는 집집을 방문 하면서 캐롤을 불러주는 관습이 있었다. 부락의 모든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쓸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11월말부터 시작하여 각집을 돌아 다니면서 캐롤을 부르곤 했던 것이다.
미국 작가Washington Irving(1783-1859)이 1820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마스날 밤 창문 밑에서 들려오는 합창단의 아름다운 캐롤 소리에 잠이 깨었다고 한다.
그 합창단은 십여 명의 옆 동네 사람들로 구성되어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화음이 서투르긴 해도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캐롤링은 그리스도 탄생의 기쁜소식을 천사들이 찬양으로 전했던 것 처럼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집집마다 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졌다.
한국에서도 6.25후 얼마 동안 까지 크리스마스 새벽이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 캐롤링의 전통을 유지 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밤이 너무 무질서하고 퇴폐적인데다가 새벽의 노랫소리가 옆집의 비기독교인 가정에 안면 방해가되어 기쁜 소식이 아니라 불쾌한 원성이 높다고하여 교회가 자진하여 캐롤링을 삼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8. 크리스마스 카드의 유래
1843년에 영국의 미술교육가 H.콜이 고안하여 왕립미술아카데미 회원인 존C.호슬리에게 그에게 한 것이 최초로 보여지며, 따라서 이를 '콜 호슬리 카드'라하여 오늘날에도 그 복제품이 팔리고 있다.
그는 성탄을 즐기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넣고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to You"문구를 적어 런던에서 1,000장을 팔아먹은 것이 시초이다.
1860년에는 온 영국에 퍼지게 되었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화되어진 것이다. 1870년 이후, 각국의 우편제도가 발달하고 그 송료가 싸지면서부터 크리스마스카드의 교환은 세계적인 풍습이 되었다.

9. 크리스마스 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결핵이 전 유럽에 만연되고 19세기 말 덴마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성이 착하고 어린이를 좋아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우체국장이었던 아이날 홀벨(Einal Holboell)은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던 중 연말을 기해 매일 같이 쌓이는 많은 크리스마스 우편물과 소포를 정리하면서 이 많은 우편물에 동전 한닢짜리 "씰"을 붙여 보내도록 한다면 판매되는 자금으로 결핵으로 꺼져가는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1904년 12월10일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게 되었으며 국왕인 "크리스챤 9세"도 적극 지원에 나서 그의 소박한 착상은 처음부터 많은 덴마크 사람들의 참여로 씰 모금 운동이 빛을 보게 되었다.
덴마크와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 곧 스웨덴, 독일 및 노르웨이 등 주변국이 뒤따르고 1915년에는 루마니아에까지 전파되었다. 동양권에서는 1910년 필리핀이 처음으로 씰을 발행하였으며 이어 일본에서는 1925년 12월에 자연요양사(自然療養社)라는 민간잡 지사가 처음으로 씰을 발행하였고 1926년부터 결핵예방회에서 본격적으로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세계 여러 곳곳에서 씰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1925년 이후로는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이태리 등 여러 유럽국가와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 및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중동지역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므로서 사랑과 나눔의 실천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32년 12월 일제치하에서 캐나다의 선교의사인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처음으로 씰 운동을 시작했다.
8.15 해방 후에는 1949년 과거 해주에서 셔우드 홀을 도왔던 문창모 박사가 주동이 되어 "한국 복십자회"에서 씰을 발행하였고 1952년 "한국 기독 의사회"에서 씰을 발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범국민적인 성금 운동으로 착수된 것은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부터 였다.
그 후 대한결핵협회는 매년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왔는데 매년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은 물론 각계각층 인사와 학생등 온 국민이 이 운동에 기꺼이 참여함으로 점차 결핵퇴치 재원모금운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세계 크리스마스 씰" 영문판을 발간하여 각 회원국에 배포하였으며 일부는 IUATLD에 기금확보를 위해서 기증하였다. '88, '89, '90, '92, '95, '96년에는 세계 크리스마스 씰 콘테스트에서 계속 1위에 입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