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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장성만 목사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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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복지대학원 2015-12-14 00:00

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자 장성만 목사 소천


삶 속에서 예수의 정신 적극 실천한 크리스천이었다

사역과 인재양성, 기독교정신 국민에 전파한

정치활동으로 한평생 봉사

 


동서학원 첫삽을 뜨고 있는 장성만 설립자(사진 오른쪽)

 

 

 

그 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거룩한 땅이요,

그 부름에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사명자라는 믿음 아래

예배당 안과 밖에서 열정적으로 예수의 삶 좇아

 

 

 

장성만 목사 설립한 동서대·부산디지털대·경남정보대는

한국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했으며 이제는 국제화 선도

 

 

 

 

 

 

그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바로거룩한 땅이요,그 부름(使命)에 응해서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사명자인 것이다.”

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자인 장성만 목사가 신앙 에세이집약속의 땅에서 설파한 말이다.2015126일 소천한 장성만 목사는예수 빼면 허수아비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삶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한 크리스천이었다.

장 목사는 예배당 안에만 머물지 않았으며,()과 속()이 구별되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예배와 삶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크리스천은 적극적으로 사회 속에 뛰어 들어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믿음에서 장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으로 평생을 사역활동과 함께 인재양성,정계 활동에 바쳤다.대학을 세워 인재를 키우고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국회에 나가 입법 활동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온 국민에게 펼치는 일도 목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발 뿌리에 구원을 갈구하는 백성이 있는 한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든지 그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라고 했다.

생애에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다고 한 장성만 목사는 감사와 영광을 오로지 주님께 돌렸다.

겪은 수많은 일들 속엔 기쁜 일,슬픈 일,깜짝 놀랄 일,숨이 막히는 고통,환희의 순간들이 짜깁기처럼 섞여 있었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요,사랑이요,은혜였다고 고백했다.

 

 

 

 

 

 

첫번째 부름:교회 창립

장성만 목사는15세이던 중학교2학년 때 소년가장이 되었다.갑작스런 아버지의 타계로 여덟 식구의 미성년 세대주가 된 장 목사는 큰 절망을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으로 이겨냈다.신학을 공부하던1953년 부산시 대교동에 교회를 창립해7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에는 청년조직인 세족회를 중심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특히6.25동란 후 한국교회의 부흥에 관심을 가진 미국 선교사들이 속속 내한해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성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장 목사는 부산 뿐 아니라 경남·강원·충청도 등 타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영남크리스천대회,부흥회,강연회를 인도하는 등 전국적 전도활동을 했다.

6.25로 황폐해진 당시 국민들의 심령에 큰 위로와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었던 것이다.

 

 

 

인생의 전환점:미국인 마크 지 맥시 선교사와의 만남

목회활동을 하던1950년대 장성만 목사에게 은인(恩人)이 나타났다.당시 부산은6.25피란민과 실업자가 거리를 가득 메우던 시절이었다.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마크 지 맥시 선교사는 한국의 처참한 소식을 듣고 부산을 여러 차례 방문해 피란민을 위로하고 고아원을 도와주고 있었다.장 목사가 담당하던 교회에서도 설교하면서 친분을 쌓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장 목사는 맥시 선교사에게 평소 생각한 바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거리에 가득한 실업자를 보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은데 당신이 도와줄 수 없겠느냐.”

맥시 선교사는먼저 장 목사가 공부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일본 신학교에 편입해 공부하면 좋겠다며 일본 유학을 주선했다.

맥시 선교사의 도움으로 장 목사는 일본 오사카성서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영어를 동시에 배웠다.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 맥시 선교사가 또 다시 장 목사를 불러이제 더 큰 물에서 공부해야 한다며 또다시 미국유학을 주선해줬다.미국 신시내티 신학대학교에서 장학금도 주기로 했다.

19629월 미국에 도착했다.며칠 후 기숙사로 한 보따리나 되는 우편물이 왔다.바로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온 초청 편지였다.맥시 선교사가 사전에200여개 교회에 편지를 보내 장 목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평일에는 공부하고 주말이면 자동차를 몰고 교회를 방문해한국의 실업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고 한다.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미국 교인들은 너도나도 도움을 약속했다.재미재단이사회를 구성하고 미국에서 모금된 돈을 이사회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두번째 부름:꿈에도 그리던 학교 설립

1964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학교를 세우기 위해 부산 전역을 찾아다닌 끝에 당시 경남지역의 폐과수원(현재 부산 주례동)을 구입했다.미국에서 가져온 기계로 직접 블록을 찍어2층 건물을 세웠다.

드디어1965년 동서기독교실업학교를 설립하고19명의 학생을 모집했다.이게 오늘의 경남정보대의 전신이다.

1991년에는4년제 대학인 동서공과대학(현 동서대학교), 2001년에는 동서사이버대학교(현 부산디지털대학교)를 세웠다.

신입생19명으로 출발했던 동서학원은 현재 산하에3개 대학을 두고 있으며 재학생2만여명의 명문 사학으로 성장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장 목사가 뿌린 씨앗이 거목으로 큰 것이다.특히 지난526일 개교50주년을 맞이한 경남정보대는 한국 최고의 전문대학으로 우뚝 섰다.

장성만 목사는50주년 기념식에서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전문 기술인 양성의 사명을 안고 학교를 세웠는데 경남정보대학만 해도10만명의 동문이 배출되어 한국 경제발전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감격해했다

동서대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려 국제화·특성화에서 가장 앞선 글로벌 대학으로 발돋움했다.매력이 넘치고 오고 싶은 대학으로 발전해 입시경쟁률도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톱클래스를 달리고 있다.

부산디지털대학교는 사이버시대에 맞춰 각계의 요구를 반영한 커리큘럼을 운영해 호응을 얻고 있다.

 

 

 

세번째 부름:정계 활동

장 목사는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교회 강단이나 학교교단이 구별될 필요가 없고 국사를 논하는 국회의사당과 땀 흘려 일하는 노동현장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다.

19813월 부산 북구에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 목사는 제12대 총선에서도 여당 출신으로는 부산에서 유일하게1등으로 당선돼1985년 당정책위의장, 1987년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탁월한 정치 역량을 보였다.

부지런한 정치인으로 통한 장 목사는 정계 활동 당시 의료보험제 전면 실시,최저임금제 실시,서민을 위한7대 복지정책 개발 등 오로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를 했다.

198813대 총선에서 패배했다.장 목사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당시50년 인생에서 맛본 첫 패배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13대 총선 실패는 화()가 아니고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고 했다.

그 때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큰 사랑이었고 그 즈음4년제 대학 설립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총선 실패 후 간절히 바라던 동서대 설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독교 사랑의 사회 실천

기독교 사랑의 사회적 실천에도 앞장섰다.

200512월 부산지역 목사·장로들과 뜻을 합해크리스천21세기 포럼을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 포럼을 통해 초교파적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차세대 교육을 지원하고 기독교 문화운동을 진작시켰다.

장 목사는 소말리아 해상에서 해적들에게 피랍됐던 마부노호 어부 석방을 위한 모금운동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200711월에는 사재1억원을 출연해 미성년 가장(중고생) 100명에게 장학금100만원씩을 전달하기도 했다.

 

 

 

수상·저서

1977년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고1978년 대통령 표창(교육공로), 2007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저서로는<약속의 땅> <예수님 때문에> <일흔일곱 가지의 지혜> <좋은 습관 좋은 인생> <지도자의 길> <발상이 힘이다> <디지털 사회를 사는 지혜> <플러스 파워>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약력

 

 

 

 

 

학력

1961.일본국 오사까 성서신학교 졸업

1964.미국 신시내티신학대학원 수료

1975.미국 미드웨스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취득

 

 

경력

1971.1980경남공업전문대학 학장역임

1981.198811,12대 국회의원 역임

1987.1988국회부의장 역임

1988.현재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1995.1997동서대학교 총장역임

1970.2005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이사장

2005 - 21C포럼 이사장

 

 

포상

1977.부산시 문화상 수상(지역사회 개발분야)

1978.대통령 표창받음(교육공로)

2007.국민훈장 목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