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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2012년 (학부)제2회 동서대 문학상 가작 (강*구)

조회 377

2012-06-13 00:00

 햇빛 찬란한 포근한 오후

컴퓨터정보공학부 강*구 

 

 

 

 햇빛 찬란한 포근한 오후. 갑자기 스치는 바람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져 사랑스럽게 날 감싸주고 지켜주건만 그 포근함과 따스함을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무심하게도 그냥 지하철역으로 들어와 버렸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전화벨이 울려왔다.

“네. 엄마. 가고 있어요. 네.”

언제나 어머니와의 통화는 별 다른 대화 없이 무심하게 끝이 난다. 아들이라 그런지 애교는 찾아 볼 수 없고 단순히 용건만 말하는 대화가 대부분이다. 책이나 TV에서 무심한 아들과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마다 조금 더 어머니에게 살가운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다짐이 지나고 나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상념 중에 지하철이 몇 정거장 지나자 등산복을 입은 단란한 4가족이 오순도순 손을 잡고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전형적인 봄철 나들이를 다녀오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내가 가족들이랑 소풍이라도 가 보았던 게 언제이더라......’

나는 그저 지하철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행복하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가족들을 힐끔힐끔 곁눈질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시계는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가방을 내 방에 던져 놓은 후 큰방 문을 열어보자 등을 보이고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새벽에 일을 하시니 언제나 이 시간에는 이런 모습의 어머니가 익숙하다. 사실 지하철 안에서의 통화도 꽤나 드문 경우였다. 방안으로 들어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드리려다 보다니 피곤에 퉁퉁 부은 얼굴과 깡마른 손목, 왜소한 어깨가 너무 초라해 보여 한숨이 나왔다. 화장대 위에는 각종 약과 수면제가 수북이 놓여 있었고 구석 한켠에는 아들들이 크게 나온 사진이 놓여 져 있었다. 어릴 때는 크고 위대하게만 보였던 어머니가 이렇게 왜소하고 작게 보인지가 언제 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던 것 같다. 새삼스럽게 눈물이 나오거나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안타까운 정도는 아니지만 항상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게 된다.

이불을 따뜻하게 덮어드리고 조용히 거실로 나와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어머니의 왜소한 등이 뇌리 속에 잔상으로 남아 내용이 그리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저 멍하니 TV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TV소리에 깨었는지 동생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형. 왔나?”

“어. 몇 시에 출근인데?”

“9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도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생을 바라봤다. 내가 학교를 다닌 후부터 가계사정에 도움이 못 되어 동생이 고생하는걸 보자니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일은 안 힘드나?”

“괜찮다. 엄마 수술비 만들려면 해야지.”

“그래. 고생해라.”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많은 걱정이 앞섰다. 눈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녹내장과 사시가 찾아오셨고 힘든 새벽 일로 인한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 또한 큰 문제였다. 어머니의 건강이 이렇게 안 좋아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18년 전, 내가 7살 즈음에 우리 가족은 경기도 안양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어릴 때라 마냥 신나고 행복하기만 했던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날... 그토록 자상하시던 어머니는 한마디 말씀도 없이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 때의 어머니의 분위기는 7살이었던 나조차도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굳은 표정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이서 3명만이 저녁을 먹고 어머니가 일찍 자라며 우리를 침대에 눕혀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날..... 폭포수 같은 빗소리에도 어머니의 비명소리는 멀리... 그리고 더욱더 멀리 퍼져나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겁도 없이 방문 틈으로 거실을 내다 봤다. 평생 동안 잊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선명한 기억의 편린이 내 머릿속에 깊숙이 그리고 아주 치명적으로 박혀 들어왔다. 아버지는 악귀 같은 표정으로 크고 기다란 옷걸이로 어머니를 후려치고 내려치고를 반복하고 계셨다. 바닥에 붉은 액체는 방울방울 져 있었고 어머니는 양팔로 얼굴을 보호하며 그렇게 누워 계셨다. 어머니는 거실을 기어 나와 집 밖으로 도망가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득달같이 쫒아갔다. 나는 한동안 아무 행동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렇게 멍하니 문틈으로 거실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얼마니 있었을까 그 소란에 4살 난 동생이 깨었는지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렸다.

“형아. 뭐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동생의 이불을 여미어 주었다.

“별거 아냐. 그냥 자. 절대 밖에 나오면 안된다. 절대로.”

동생은 뭔가 알고 있는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가보았다. 거실에는 부서진 옷걸이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검붉은 자국들이 두서없이 튀어있었다. 카펫에는 한 아름 붉은 웅덩이가 고여 있어서 그 곳에 반사된 내 얼굴이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때 작은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형아. 뭐해.”

“야! 나오지 마. 들어가.”

동생은 내가 소리를 지르자 찔끔 했는지 고개만 삐죽 내밀고 날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재워 주었다. 간신히 동생을 재우고 나도 침대에 누웠지만 그 날은 정말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에 못 이겨 결국 이혼 하셨고 어머니는 혼자의 몸으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 하셨다. 이혼 직후에는 위자료가 있어 큰 어려움을 격지는 않았지만 회심 차게 준비한 사업이 실패하시면서 가계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 어머니가 저녁 늦게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출근하시는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이... 어머니는 늦은 출근을 하고 항상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몸과 새빨간 얼굴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셔서 언제나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드셨다. 어릴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머리가 커진 후에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눈치 채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깨달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친구들에게 최대한 숨기려하고 중, 고등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조사 같은 것을 하면 항상 아버지는 ‘없음’이었고 어머니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서비스업이라고 써 넣었다. 그러한 도우미 일을 다년간 하셨으니 작금의 건강 상태를 가지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 있다. 아들은 엄마의 평생 짝사랑 상대라고. 짝사랑이라는 것은 상대가 그 사람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20대에 들어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을 어렴풋이 느껴가고는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어머니의 모성애는 아들인 나로서는 평생을 가도 다 이해하지 못할 숙제 같은 의미이고 또한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내가 같은 부모의 입장이 되어야만 어느 정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이해하고 있는 작은 일부분이라도 느끼게 되니 왜소한 어머니의 몸과 벌써부터 굽어보이는 허리가 안쓰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고 그것이 어머니를 기쁘게 함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정말 힘든 시간들을 지나왔지만 나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반성하고 한번 돌아볼 뿐이다. 창피해 하지도 않는다. 단지 당당하게 밝히고 더 낳은 미래를 위해 나를 고쳐나갈 뿐이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지는 모른다. 단지 평생 내가 갚아야 할 은혜라고 생각 할 뿐이다...

큰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 왔네. 밥 먹었나?”

“아니. 엄마. 밥 차려줘.”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히 채웠다. 그 순간 나는 아까 보았던 봄나들이 가족들이 부럽지 않았다. 나도 그리고 나의 부모님도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집안을 꾸려나가고 있다.